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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령사회를 준비하는 디자인

삶의 환경을 다시 설계하는 일

이경미(늙어도괜찮아 디자인연구소 대표)

한국 사회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 평균수명이 늘고 의학기술이 발달하면서 더 오래 살게 되었지만, 오래 사는 것이 곧 잘 사는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신체 기능의 약화, 관계의 축소, 고립감, 외로움, 돌봄의 부담 등 초고령사회에서 마주하는 문제는 매우 다층적이다. 이 변화는 단순한 인구 증가 현상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구조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는 요구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디자인은 이러한 변화의 요구에 대응하는 중요한 도구다. 공간, 동선, 경관, 환경을 재구성하는 일은 결국 인간의 삶을 다시 설계하는 일이며, 이것이 초고령사회에서 디자인이 맡게 되는 핵심 역할이다.

첫 번째로 필요한 관점은 관계를 회복하는 디자인이다. 나이가 들수록 신체 기능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가 약해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독거노인 인구가 증가하면서 고립감은 주요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관계는 단순한 정서적 위안이 아니라 삶의 안정성과 자존감을 결정하는 중요한 자원이다. 따라서 고령 친화적 디자인이란 개인을 ‘보호받는 존재’로만 바라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관계를 회복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을 안에서 우연한 만남이 일어나도록 조성한 공유 공간, 세대 간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지역 거점, 식사와 취미활동을 함께할 수 있는 개방형 커뮤니티 공간 등이 그 사례가 될 수 있다. 관계를 촉진하는 공간은 고령자의 자존감 향상과 사회적 참여를 강화하는 핵심 요소로 기능한다.

두 번째 관점은 이동과 접근성을 재구성하는 디자인이다. 나이가 들수록 이동의 어려움은 활동 범위를 좁히고 사회적 참여를 제약한다. 짧고 단순한 동선,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사인(sign), 경사로와 손잡이 같은 물리적 보조물은 단순한 편의성의 문제가 아니라, 고령자가 일상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필수 조건이다. 이동 경로에 휴식 공간을 배치하고, 표지판을 시력 변화에 맞추어 크게 설계하며, 공간의 색채 대비를 명확하게 하는 등 작은 요소 하나하나가 실제 삶에 큰 차이를 만든다. 접근성이 좋아지면 고령자는 다시 지역으로 나올 수 있고, 참여 활동은 자연스럽게 확대된다. 이는 지역사회가 지속 가능한 돌봄 구조를 갖추는 데 매우 중요한 기반이 된다.

세 번째 관점은 자립과 돌봄이 공존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고령사회에서 돌봄 문제는 단순히 시설을 확충하거나 돌봄 서비스를 늘리는 방식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가능한 범위 안에서 스스로 생활을 운영할 수 있도록 돕는 환경을 설계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넓혀주는 설계가 필요하다. 일상 공간 안에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조리, 위생, 안전 장치가 배치되고, 커뮤니티 공간에서는 직접 참여하고 기여할 수 있는 활동이 마련될 때, 고령자는 도움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주체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다. 돌봄이 서비스 제공 중심에서 벗어나,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구조로 바뀔 때, 지역 사회는 보다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고령친화 환경을 갖추게 된다.

초고령사회 디자인의 가치는 단순히 공간을 개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디자인은 사회적 관계와 경험을 재구성하는 역할을 한다. 가구의 배치, 조명의 위치, 좌석의 높낮이 같은 사소해 보이는 요소가 사람들의 움직임을 결정하고, 대화의 분위기를 바꾸며, 커뮤니티의 형성을 촉진한다. 예를 들어, 정면을 향한 일렬 의자 배치보다 원형의 테이블 구조는 서로를 바라보고 대화를 나누게 만든다. 이러한 작은 변화는 노인의 사회적 고립을 완화하고 공동체 참여를 높이는 데 큰 영향을 준다. 디자인은 개인의 경험을 바꾸는 동시에, 사회적 회복력을 높이는 기능을 한다.

지역 기반 디자인의 중요성도 크다. 고령사회는 지역 단위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므로, 지역의 특성과 주민의 생활 패턴을 고려한 설계가 필요하다. 기존의 상점, 카페, 공방 같은 공간을 작은 돌봄 거점으로 확장하는 방식은 비용 대비 효과가 높고, 주민 참여도 자연스럽다. 이동 경로를 따라 ‘안심 구역’을 설정하고, 벤치나 그늘막 같은 작은 시설을 배치하는 일도 지역 기반 돌봄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실제적인 도움을 준다. 이러한 설계는 특정 기관이나 프로그램에 의존하지 않고, 일상의 흐름 안에서 서로 돌볼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의미를 갖는다.

우디식탁 프로젝트는 매주 지역의 어르신과 청년, 돌봄 가족 등 다양한 이웃과 따뜻한 밥상을 나누는 자리다. 함께 밥을 먹는 행위는 단순한 음식 공유를 넘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위로와 응원을 주고받으며 세대와 삶을 이어나가는 가장 기본적인 소통 방식이다. 우디식탁은 식사를 매개로 ‘공동체 회복을 위한 사회적 환대’를 실천해가는 실천운동이다. 그 중심에는 환대의 주체로 나서는 베이비부머 세대가 있다. 공감하고 경청하고 응원하는 이들의 태도는 청년에게는 멘토가 되고, 중장년에게는 동반자가되며 지역 이웃에게는 연대의 씨앗이 된다. 작은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나누는 순간들이 모여 초고령사회의 새로운 공동체적 미래를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초고령사회를 준비하는 디자인은 기능 중심의 설계에서 벗어나 인간 경험 중심의 설계로 이동해야 한다. 젊은 세대 중심의 표준화된 공간이 아니라, 생애 전 주기를 고려한 환경이 필요하다. 시설 중심의 돌봄 구조에서 지역 기반, 생활 기반의 구조로 변화해야 한다. 사용자의 삶을 실제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 그들이 어떤 순간에 불편을 느끼고 어떤 조건에서 활력을 얻는지 세심하게 관찰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고령자의 경험을 반영한 디자인은 단지 ‘편한 공간’을 넘어서,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한다.

결국 초고령사회 디자인은 “어떻게 존엄하게 나이 들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사회적 답변이다. 인간이 나이 들어도 사회의 구성원으로 남을 수 있게 하고, 서로를 돌볼 수 있는 구조를 만들며, 지역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유지하도록 돕는 것이 디자인의 역할이다. 초고령사회는 위기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상상력을 요구하는 시기다. 디자인은 그 상상력을 구체적인 형태로 구현하는 과정이며, 앞으로의 사회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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