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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나를 만나다

내 삶을 그리는 자화상

김정화(서울공예박물관장)

앞에 있는 사람을 그림으로 그려보신 경험이 있으신가요? 그의 얼굴을 사진처럼 꼭 같이 그리려고 노력할까요, 아니면 그 사람의 심상을 드러내는 특징을 강조하도록 그리려고 할까요? 그런데, 그리다 보면 처음에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물이 생기지는 않을까요?

기원전 6세기에 어느 소녀가 사랑하는 소년이 전쟁에 나가야 해서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별이 슬픈 그 소녀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벽에 비친 그림자를 따라 선을 그어 그 사람의 모습을 간직하고자 했습니다. 소녀의 마음을 헤아린 아버지가 그 얼굴을 흙으로 구어 타일로 만든 것이 최초의 초상화라고 합니다. 그녀가 그린 얼굴은 사랑과 그리움을 가득 담고 있었을 것입니다.

화가마다 자신이 그리는 초상화에 대해 정의하는 바가 다릅니다. “화가는 닮은 모습, 또는 하나의 변형, 또는 하나의 해석을 그린다.”라고 하는가 하면, “모델은 그림을 돕기 위해 있을 뿐이며, 화가에게 모델의 인격이나, 심지어는 외관까지도 큰 관심사가 아니다”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목이 길고 눈이 파란 여인을 많이 그린 모딜리아니는 모델의 영혼을 알게 될 때, 그제야 마지막으로 눈을 그린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초상화들을 보며 그림 안의 그들이 누구였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해하며 그들과 대화를 나누려고 시도합니다. 그런데 그 인물이 나폴레옹같이 유명한 ‘그 사람’이라도 화가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표현했음을 발견합니다. “모든 초상화는 모델이 아니라 화가 자신을 그린 자화상이다. 모델은 그저 우연한 계기일 뿐이다. 색깔이 칠해진 캔버스에 드러나는 것은 화가다.”라는 말에 공감하게 됩니다.

그러면 화가가 모델이 아닌 자기 자신을 그린 자화상은 어떨까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직접 그리는 자화상은 무엇보다 화가의 생각이 담기지 않았을까요. 윤동주 시인이 쓴 <자화상>에서처럼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이 밉기도 하고, 가엾기도 해서, 자신에 대한 연민을 담아 그렸을지도 모르겠고,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한 나르시소스처럼 자기애에 가득 찬 자신을 그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을 그리기 위해서는 자신을 봐야 합니다. 사진이 없던 시대이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림을 그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미술사에서 화가가 자기 모습을 그린 최초의 사례는 12세기 말 서적의 작은 삽화에 처음 등장합니다. 루필루스라는 수사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본인이 ‘쓰고 그렸다’라는 주석을 달아 놓았습니다. 그림을 통해 그림을 그린 사람의 정체성을 처음 밝힌 것입니다.

르네상스 시기에 회화가 발전하면서 화가들이 그림 속 군중 가운데 자기의 모습을 그려 넣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기록하고자 한 사례가 많이 있습니다. 얀 반 에이크가 1433년에 그린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화폭 전면에 주인공 남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들 뒤로 벽에 둥근 거울이 하나 걸려 있는데, 그 거울을 자세히 살펴보면 거울에 비친 화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작게 그려져 있지만, ‘1433년에 얀 반 에이크가 여기 있었다’라는 글귀와 함께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술가의 지위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반영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보티첼리의 <동방박사의 경배>(1475년),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1509-1511년) 등, 많은 작품에서 화가들은 군중 속에 작게나마 자신의 모습을 그려 놓았습니다.

독립된 자화상을 그려 본격적으로 자신을 부각한 첫 작가로 독일의 뒤러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많은 자화상을 남겼는데 그중 1500년에 그린, 마치 예수처럼 자신을 표현한 작품이 가장 특별합니다. 화가는 자신을 화가로서 ‘내가 28살의 나를 그렸다’라고 쓰고 있으면서도, 황금빛으로 빛나는 신성한 모습을 만들어 우월한 자신의 영원히 남길 바라는 이미지를 그린 것입니다. 이렇게 의도가 담긴, 생각대로 만들어진 모습을 그린 그림이 진정한 자화상인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면 자화상을 그리는 화가는, 그림을 창작하고 있는 그 순간,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실제 모습, 즉, 그림을 그리는 모습으로 자신을 제시하는 것만이 가장 솔직한 모습일까요?

많은 화가들이 자화상을 자신의 역량을 알리는 마케팅 도구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초상화를 의뢰할 고객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였기 때문입니다. 혹은 자화상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신에 대해 내가 누구인지 자문하는 순간의 기록이기도 하고, 아니면 당시에 화가가 느끼고 있는 감사의 마음이나 사랑, 한탄이나 원망의 감정을 알리고 싶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놓은 공간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자화상은 무엇을 어떻게 꾸몄든 간에, 작가의 심중에 있는, 부정할 수 없는 내적 진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17세기 여성 화가 아르테미스 젠틸레스키는 스스로를 회화의 알레고리로 표현함으로써 ‘내가 곧 회화이다.’라는 굳은 의지를 선언하였습니다. 여성이 활동하기 어려웠던 시대에 예술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천명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19세기 구스타프 쿠르베는 <화가의 아틀리에>라는 대형 그림 한가운데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신을 두고, 한쪽에는 자신을 화가로 살 수 있게 하는 컬렉터, 평론가, 화상 같은 부르주아 사회의 군상을, 그 반대편에는 도둑, 집시, 거지 등, 사회의 어두운 면을 차지하고 있는 소외당하고 있는 군중을 그림으로써, 화가가 가진 사실주의적 사회관을 서술하였습니다. 자화상은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변하는 화가들의 존재에 대한 자의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렘브란트(1606-1669)는 일생에 걸쳐 80여 점의 자화상을 남겼습니다. 20대 초반의 렘브란트는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그리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밝음과 어두움이 극명하게 대비를 이루는 화면 가운데, 빛과 그림자의 중간, 경계에 배치한 얼굴에는 두 눈도 확실히 보이지 않습니다. 묘한 빛의 효과만으로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색채의 세밀한 변화를 통해 형태를 만들어내면서도 섬세한 머리카락과 레이스를 구사하는 회화적 기량을 보이고자 하는 젊은 화가의 풋풋한 의도일 것입니다. 그는 군인 복장을 하거나, 깃털이 달린 옛날 의상을 입은 기획된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독창적인 기법을 자랑했고, 그의 자화상은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암스테르담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던 30~40대의 자화상 속의 렘브란트는 도시의 당당한 시민으로 등장합니다. 성공을 상징하는 세련된 모피 옷을 입고, 황금 체인 장식을 한 부유한 인물입니다. 아내와 화려하고 무절제한 삶을 즐기는 모습을 가감 없이 그려낸 그림 속 렘브란트의 얼굴은 행복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그가 존경해마지 않던 르네상스 시기의 대가들이 그렸던 인물화처럼, 르네상스 시대의 옷을 입고, 르네상스 방식으로 자화상을 그림으로써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죽고, 과한 낭비로 인해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기 시작하면서 그의 자화상에서는 슬픔 앞에 자문하는 모든 감정이 담긴 눈빛이 가득한 얼굴을 보여줍니다.

이후 10년 가까이 자화상을 그리지 않습니다. 그 후에 돌아온 그의 모습에서는 화려한 외양이라곤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작업복을 입고 허리에 손을 짚고 있는 그는 이제 더이상 연기를 하듯 만들어진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된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의 모든 심정은 얼굴에 담겨 있습니다. 정면을 응시하는 복잡한 시선만이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합니다.

50대 이후에 그린 말년의 자화상들은 깊은 고뇌와 삶에 지친 모습에서부터, 달관의 경지에 이른 노인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얼굴에 모든 것이 집중된 어두운 화면 속에서 그의 두 눈은 슬픔과 실의로 찾아온 노쇠가 어떤 것인지를 솔직하게 알려줍니다.

그러나 그의 말기 자화상이 패배자로서 자신을 기록하듯 그린 것이라고 선뜻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노쇠를 인정하면서도, 화가로서, 또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숭고한 상태로 올려놓고야 마는 거룩한 자신감을 함께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그림으로 쓴 자서전’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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